<어라연> 사라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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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연> 사라짐에 대하여이윤정 주부

영월신문 | c3740039@chol.com

승인 2007.12.14 13:16:01

가로수 밑에 수북이 쌓였던 낙엽이 흔적 없이 흩어지고 나무는 긴 침묵의 계절로 들어갔다. 아무리 씩씩하게 지내야지 맘을 먹어도 앙상한 나뭇가지, 스산한 바람, 정지한 듯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물은 애써 눌러놓은 쓸쓸함과 우울을 불러낸다.
겨울이 싫어 사람도 동면하는 습성이 있었으면 하는 가당찮은 상상도 해본다.
기온이 뚝 떨어진 날 저녁, 하늘 한편을 주홍빛으로 물들인 노을을 보면 문득 낡은 지붕위로 부드럽게 피어 올라가는 뽀얀 연기가 그립다.

동네아이들과 늦도록 놀다보면 ‘윤정아~저녁 먹어라’ 하시던 할머니의 정겨운 음성과,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가도 부담 없던 친구들이 보고파 목이 멘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풍경들이 못내 그리워 지난 기억들을 들추어내려고 하면 어디쯤에서부턴가 순서가 엉클어져 추억도 맥 못 추게 하는 떨어진 기억력만 안타까워진다.

그러나 그립기만 할뿐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의 편리함에 익숙해 불편한 것을 참아낼 수 없으므로. 그럼에도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한 설렘보다 지나간 것이 더 소중하고 애틋한 것은 아마 나이에서 연유한 것이지 싶다. 이렇게 모든 것이 세월 속에 속절없이 묻히고 말건만 우리는 천년을 살듯 헛된 욕심보따리를 채우기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받은 교육 중에 유언장을 써오라는 과제가 있었다. 처음엔 얼마간 기분 나빠하고, 얼마간 장난스런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딱히 물려 줄 재산이 많지 않은지라 사랑하는 아들딸로 시작해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내가 좋은 본보기로 살지 못해 미안하다, 라고 뻔한 교훈을 적다가 어느 순간 진지해졌다. 지금껏 살면서 나는 얼마나 따뜻한 사람이었나? 제 할 노릇은 잘 해왔는가? 나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유언장은 결국 참회록처럼 되고 말았지만 죽음을 마주하자 보이는 건 제대로 된 삶이었다. 강의했던 교수는 일 년에 한 번씩 누구나 유언장을 써보는 습관을 가져보라고 하셨다. 죽음을 멀게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렇게 막 살지는 않을 거라고.

근세 백여 년 간 우리는 많은 것을 사라지게 했다. 아름다운 전통과, 사람다움에 대한 고민, 골목마다 그득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사라져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백여 년쯤 후엔 한반도의 사계절도 없어진다고 한다.그냥 가게 내버려두느냐 잡고 매달리느냐는 우리 몫이다. 생성과 소멸의 엄격한 원리 속에 사람도 포함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이제 2007년과 함께 5년 동안 국정을 맡아 애쓰신 대통령도 역사 속으로 물러나고 새로이 5년을 책임질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각자 선택하겠지만 참 일꾼을 뽑았으면 좋겠다. 야속하게 가버리고 남은 마지막 달은 추위 때문에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아주 좋은 계절이다.

가까운 이웃에게, 오해로 소원해진 친구에게, 한결같이 곁에 있어준 짝꿍에게, 쑥스러워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간단한 메시지로 대신해보자.
고마워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