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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연> 나를 위한 변명이윤정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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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10.20  13: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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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고도 겨울이라고도 말하기 애매한 11월, 춥고 긴 겨울을 대비해 맞는 예방주사 같은 달이 다가옵니다. 스산한 바람과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 밤이 길어지면서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천둥벌거숭이 같은 사람도 이때만은 제법 진지해져 지나온 시간을 살피게 된다고 합니다.

화려한 색채의 산과 하늘이 반대로 인간을 초라하게 하고 겸허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이 계절에 잠깐의 반성과 겸손만으로도 신은 우리를 기특해하시고 해마다 은총을 내리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사람을 철들게 하고 나이테를 긋는 계절 또한 가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독과 허무의 감정으로 인해 더욱 신과 가까워지는 이 가을에 고궁 나들이를 했습니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다녀왔는데 오백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내하느라 많은 환난과 영욕의 역사를 싸안고 도심 한복판에 고색창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경복궁은 화재와 중건, 그리고 일본의 훼손까지 더해져 아직도 복원중이라고 합니다. 그나마 원형대로 살릴 수는 없고 복원사업에 몇 백 년씩 된 소나무들이 엄청나게 베어져야 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속상합니다. 지금시대라면 궁궐에서 사는 사람보다 모두가 그토록 찬탄하는 지붕의 곡선미와 화려한 단청과 문양들, 과학적인 설계로 궁을 건축한 건축가의 이름이 더 날리지 않았을까하고 이름 없이 사라진 장인들이 다시 태어나 다시 한 번 놀라운 솜씨를 보여 주면 좋을 텐데, 아쉬운 생각을 했습니다.

세세한 설명을 들어가며 구석구석 구경을 하다 보니 자객을 막기 위해 침실 주변에는 나무도 심지 못했고 왕의 은밀한 시간까지 사방에서 지켜보았다고 하니, 권력대신 자유를 박탈당한 것 같아 으리으리한 대궐 살이가 조금도 부럽지 않아집니다.

창덕궁은 경복궁에 비해 인간적인 것 같아 숨통이 트이고 앙증맞은 정자와 잘 가꾸어진 정원은 왕과 그의 여자들의 얽히고 설킨 애증마저 로맨틱하게 각색해줍니다.
돌아 나오며 권력을 갖는 대신 자유를 박탈당한 용의 위엄보다 진흙탕일망정 제멋대로 꿈틀대고 사는 미꾸라지가 더 행복할거라 생각했습니다. 박주산채일망정 오롯이 내 것인 못생긴 지어미, 지아비의 마음 편한 삶이 왕후장상보다 행복의 순도나 밀도가 크지 않을까요? 이 말을 해놓고 보니 행복의 본질을 깨닫는 눈이 조금은 생길 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만큼 마음은 더 치열해져 생채기가 아물 날이 없도록 살아온 2,30십대라면 이제는 가질 수 없고 누릴 수 없으면 버리자, 달관인 듯 체념인 듯, 제 마음을 다스리는 제일 편한 방법을 선택했지요. 저절로 여우의 신포도 같은 처세의 지혜가 배워집니다.

그럼에도 자식에게만은 집착과 욕심을 끊기 어렵습니다. 인성과 감성이 더 중요하다고 교육학자가 아무리 떠들어도 성적에 더 욕심내고 다그칩니다. 나의 못다 한 꿈까지 얹어 성공해서 남들에게 으쓱해 보이고 싶은 욕망이 독버섯처럼 자리 잡아 은근히 등급의 경쟁 속으로 내몰고 맙니다.

환경이 걱정된다고 하면서 편리함에 익숙해져 죄의식 없이 일회용제품을 쓰고 따로 버려야할 음식쓰레기도 가끔 귀찮아서 하수구로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많은 원칙들이 유익과 편리함 앞에 종종 무너지지만 뻔뻔하게 융통성이라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글을 쓰는 일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음에서 미처 숙성하지 못한 거짓 활자들을 내 뱉을 때 마다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생가지를 꺾어 불을 지피고 덜 익은 과일을 딴것처럼 찜찜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런 것들이 타성이 되어버려 종국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불합리와 불법을 보고 맘은 상하지만 당당하게 말을 못하는 비겁함도 한 몫 합니다.

하나 둘 변명을 늘어놓으며 양심으로 가는 혈관이 굳을 까도 걱정이지만 변명조차 하지 않게 되면 어쩌나 더 걱정입니다. 변명을 하는 건 나름대로 삶에 애착이 있기 때문이라고 또 변명을 해봅니다.

시대를 잘못 만나서, 넉넉한 부모를 만나지 못해서 내가 이 모양이라는 넋두리도 이제 시효가 지난 지 한참인데 나는 아직도 가끔 속상할 때 핑계거리로 써 먹습니다.

직유가 아닌 은유가 어울리는 계절, 끊임없이 죄를 고백하고 싶게 하는 이 가을에 이런저런 허물을 일찍 자백하고 한해를 갈무리하고 싶은 알량함이 수다스럽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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