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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후유증, 50여 년간 누워 생활신흥선씨 생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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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03.14  12: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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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5년 째 누운 채로 살아가고 있는 신흥선씨 근처에는 혼자서 먹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과 숟가락, 밥솥, 거울, 책, 라디오 등 온갖 살림살이와 물건들이 가득 차 있다.


영월토박이로 농사일이 전부인 줄만 알았던 소박했던 유년기

영월군 남면 북쌍1리 들골마을에 살고 있는 신흥선(辛興善)씨는 1933년 9월 17일(호적 1935년생) 아버지 신해석씨와 어머니 엄정극 사이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올해로 일흔네살이며, 고향인 들골마을에서 아들과 함께 3대째 살아가고 있는 영월토박이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들골마을에는 약 30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주로 보리농사와 벼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는데 논은 참나무재 넘어 돌고개마을에서 부쳤다고 한다. 지금은 잠수교가 설치돼 있는 들골나루터 건너에 있는 들골마을은 신씨(辛氏), 이씨(李氏), 안씨(安氏) 들의 집성촌으로 신씨의 작은 아버지도 함께 이웃에 살고 있어서 그는 친척 사촌들과도 가족같은 분위기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신씨의 부친인 신해석씨가 부치던 농사의 규모는 밭이 4000평, 논이 8마지기 정도였으며 신흥선씨는 농사일을 거들고 집안일을 돌 본 것이 유년기 기억의 전부다.
11살이 되면서 그는 연당리에 있는 연당공립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북쌍리를 비롯 서면, 후탄리, 옹정리 마을 등에서 온 학생들은 그 수가 7~80명에 달했고 변변한 교실이 없어 칸막이를 친 채 일본어와 한자 등을 배웠다.


한국전쟁 발발, 국군수색대 자원 - 하나뿐인 동생 피난 중 아군 총에 맞아 사망
귀가조치 후 인해 척추, 허리까지 마비

1950년 12월 중순경. 한국전쟁 발발 후 들골마을에도 전쟁의 풍파는 몰아닥쳐 열일곱살을 맞은 신씨는 마을에 들어 온 육군 3843부대 1대대 1중대(중위 김용수) 국군수색대에 자원을 하게 된다. 겁이 나기도 하고 무서웠지만 당시에는 모두들 도망가기 바빴고 자신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 의무감에 자원을 하게 됐다는 그는 의로운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열다섯살이었던 동생 백선씨가 피난길에 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와 동생은 피난을 간다고 정신이 없는데 그런 가족을 돌보지 않고 수색대에 자원을 했지. 그때 어머니와 동생을 잘 보살폈더라면 그 난리통에 그것도 아군의 총에 맞아 동생을 보내는 일은 없었을 텐데. 총에 맞아서도 빨갱이 아니라고, 난 아니라고,.. 소리쳤다는데. 눈만 오면 그날 생각이 자꾸 나... ” 동생의 유골은 당시 주천강 자갈밭에 묻혔지만 그는 동생의 유골을 찾을 엄두조차 내지못했다.
다음해 4월까지 수색대원으로 활동한 그는 눈이 허리까지 차는 산길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나무에 부딪쳐 살갗이 벗겨지는 등 손과 발은 늘 타박상과 동상상태였다고 회상했다. 또 영하 10도가 넘는 혹한의 추위에도 잠은 반공호에서 잔 적이 다반사였고 먹을 게 없어 민가에서 겨우 옥수수죽으로 간신히 허기를 채운 배를 잡고 24시간 내내 쉴 틈도 없이 수색을 한 날도 많았다고 한다.
열일곱살의 겨울과 열여덟 청년의 봄을 전쟁 수색대원으로 보낸 그에게 1951년 4월 드디어 귀가조치가 떨어지게 된다. 동상에 걸린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자리에 몸져눕게 되는데 손과 발에 마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추후 척추와 허리 등에까지 마비 증세가 악화돼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버지 신해석씨는 그런 아들을 두고만 볼 수가 없어 서울대학병원과 부산백병원 등 유명한 병원이면 며칠씩 걸리는 길도 마다하지 않고 아들을 들춰 업고 백방으로 애간장을 태웠고 치료비 마련을 위해 가지고 있던 논과 밭도 팔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데리고 다니기가 힘들어 왕진을 받게 하면서까지 아들의 몸을 움직이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건 가난뿐이었다.
이처럼 5년을 하루같이 아들의 치료에 매달린 그의 부모는 더 늦기 전에 아들을 결혼시키기로 하고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다른 마을의 처녀와 혼인을 시킨다. 이때 그의 나이가 스물세살이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도 잠시 가난과 병든 남편을 봉양하며 살기 힘들어진 아내는 흥선씨의 아들 승배씨가 6살 때 집을 나가고 만다.


딸은 품을 팔고 아들은 공사장으로 아버지와 생계 이어가

아내가 집을 나간 후 집안의 생계는 딸 옥성씨의 아들 승배씨의 몫이 되었다. 옥성씨는 매일 밭일을 하다시피 품을 팔았고 승배씨 역시 1980년 누나가 시집을 가게 되면서부터 공사장과 밭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지금도 신씨는 아들 승배씨가 자기 때문에 영월공고 재학시절 3년 내내 장학생이었으면서도 대학을 가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혀 있다. 또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느라 스물여섯살이 되어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승배씨의 이력 또한 그에겐 아버지로서의 아픔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시작한 것이 도장을 파는 일이었다. 다리와 허리가 마비된 상태에서 운동으로 회복한 팔과 손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장을 새겨주고 차마 돈을 받을 수가 없었다는 그는 이웃들이 성의로 가져 온 음식과 계란, 과자 등을 마지못해 받기도 했다.


거울 3개로 밥하고, 이발, 용변까지
권총이 없었던 게 천만다행

도장파는 일도 없고, 아들 승배씨가 3~4일씩 공사일을 가는 날이면 하루 종일 혼자 있는 그에게 고독감과 무력감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고 죽음을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일부러 아들이 챙겨놓은 음식에는 손도 안대고 굶어보기도 했지만 결국 모질게 이어지는 목숨앞에서 그는 손에 잡히는 것들을 집어던지며 악을 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남칠여구라 했는데, 그렇지도 않아. 오일을 굶어봤는데, 하루만 더 있으면 죽겠는데... 아무래도 내 목숨이 모질지가 못한 가봐. 권총이라도 있었다면 벌써 저세상으로 갔을텐데... .”
몇 번을 시도해도 모질게 붙어있는 목숨앞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그는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그의 몸 1미터 이내에는 먹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살림살이들로 가득찬다. 그 중 가장 소중한 물건은 동그란 손거울인데 밥을 먹을 때와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깎을 때, 용변을 볼 때 적당한 각도의 위치에서 그의 시야를 확보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밥은 아들이 미리 준배해 둔 피트병의 물을 이용해 전기밥솥으로 해먹고 이발도 손거울 3개를 이용해 다듬고 있다. 용변은 피트병을 이용하거나 비닐봉지에 받아 긴 막대기로 고리를 만들어 한 곳에 모아두면 아들 승배씨가 돌아와 처리한다.
아들 승배씨가 출근하고 나면 아무도 찾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라디오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라디오를 켜는 일이고 하루의 마지막 일도 라디오를 끄며 잠을 청한다.
이렇게 생활하면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은데, 어떤 점이 가장 불편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제는 그냥 해야 하는 일이려니 하며 받아들이고 산다”며 “다만 이가 다 빠져서 잇몸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게 가장 불편한 점”이라고 답했다.


1년여 끝에 2003년 참전유공자 판정
아들 장가보내는 게 제일 걱정

그는 현재 참전유공자로 월 6만원의 지원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장애진단 역시 할 줄을 몰라 지난 94년 2월 마을 이장의 도움으로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2002년부터 아버지의 국가유공자 판정을 받기 위해 향군회관과 보훈회관, 국방부를 찾아다닌 아들 승배씨는 1년 후인 2003년 5월에 참전유공자로 판정받고 지금도 국가유공자 판정을 위해 당시 수색대장의 확인서를 첨부 함께 한 대원들과 증인들을 수소문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서 의용군으로 활동한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사실여부를 위해 중단할 수 없다는 아들의 의지를 꺾지도 못하고 짐이 되고 있다는 그의 가장 큰 소원은 아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구해 좋은 짝을 만나는 것.
“우리 부모님이 나한테 그러실 때는 몰랐는데, 나이 40이 넘도록 아비 때문에 직장도 제대로 못 잡고 혼자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늘 안됐어. 빨리 좋은 짝을 만나냐 할 텐데... . 내가 이러고 있으니 맞선을 봐도 오겠다는 여자도 없고... .”
사실 승배씨는 토목건축, 전기용접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이지만 영월에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외지로 나가고 싶어도 아버지 때문에 나갈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월 6만원의 지원금과 아들 승배씨가 간간이 벌어오는 생활비로 생계를 꾸려가는 그는 현재 지난 2002년 면사무소에서 신축해 준 10여평의 집에서 난방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지내고 있다. 장애인종합복지관 평창분관에서 배달되던 반찬지원도 끊긴지 3년이 넘었고 건강보험료도 체납돼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에도 가지 못할 형편에 놓여 있다.
“그때 땅만 팔지 않았어도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을텐데 생각하지. 그래도 열심히 운동한 탓에 팔과 손은 꿈적거릴 수 있으니 목숨이 붙어있는 날까지는 살을라고. 어디 죽고 사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어야 말이지.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 이런 모습도, 생활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겠어. 가만 생각하면 제일 미운 것도 야속한 것도 나라고... 말을 해야 뭐하겠나만은. 그래도 저 놈(아들) 장가는 보내고 죽어야 될 건데. 그게 제일 걱정이지.”

*이웃기행은 우리 주위에 있는 이웃을 찾아가 한 인간의 삶의 자취와 흔적을 더듬어봄으로써 살아 온 삶의 방식에 대해 알아보고 문화적인 가치에 접근하고자 마련된 지면입니다. 우리 이웃의 아름다운 이야기나 삶의 모습을 담고자 하시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정애정 기자/bluemay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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