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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부 장원작>
옛집 터
이 영 희 강릉시
청치마 두르고 누웠던
가을이
기쿠로지의 여름 속으로
걸어 나온다.
살아 있던 목소리
탱그르르
빛이 그림자와
마주보며 웃는다.
하늘 안고 터질듯한 배
부풀리고 있던 마당 그 터에
긴 해그림자 뉘여 놓고
개여울에 흐르는 설레임,
타작하는 소릴
아직도 듣고 있다.
바람부는 옛터의 소리
반들반들한 햇살로 구워내
말랑한 얘기로 채우고 싶다.
*기쿠로지: 영화 OST 중 피아노곡
<고등부 시부문 장원작>
구두
황슬기 청주 금천고 2년
아버지 손에는
구두상자가 들려있었다.
번지르르한 표면에
커다랗고 굵게 쓰여진
할머니 이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아버지 눈동자에
동동 떠다녔다.
할머니는 갓난아기다.
알록달록 꽃무늬 옷 대신
늘 같은 순백의 옷을 입고
이름표가 붙은 침대에서
아버지를 기다린다.
매일 삼각모자를 쓴
유모들이 주는
맛없는 죽을 먹고
색칠된 시간표대로
걸음마를 한다.
아버지 손잡고 시작한
걸음마는 점점 뜸해지더니
나이를 거꾸로 먹는
할머니는 이제
누워서 옹알이를 한다.
아버지는
구두상자를 열어
구두를 꺼낸다.
더 작아진 아기의 발이
헐거운 구두안에서
꼼지락 댄다.
아기는 앉아있기가
버거운 듯 몸을 젖히고
아버지는 울음참기가
버거운 듯 고개를 젖힌다.
<고등부 산문부문 장원작>
구두
엄보람 석정여고 1년
어둡고 조용한 복도를 낯선 선생님을 따라 걸어갑니다. 바뀐 교복이 살에 스치는 소리를 따라 오그라드는 가슴, 얼어붙는 손끝. 심호흡을 한번 하기 전에 선생님은 미닫이문을 열어젖힙니다. 곧바로 쏟아지는 32개의 시선에 등줄기를 따라 땀방울이 흐르고, 떠듬떠듬 이름을 말하는 내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창가쪽 맨 뒷자리. 저를 포함하면 홀수가 되는 탓에 짝도 없이 혼자입니다. 전학생의 존재를 금세 잊은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웃고 떠들기 바쁩니다. 싸늘한 구석자리, 난롯불도 닿지 않는 그곳에는 울음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개진 열네살의 제가 있었습니다.
전학 신고식을 너무도 쓸쓸하게 치른 저는 그날부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습니다. 모든 것을 완벽히 해내리라, 구석의 나를 교실 한가운데로 이끌어 내리라고 독을 품었습니다. 전학 첫날 무기력하고 조용하기 짝이 없었던 내 모습이 치가 떨리게 싫었습니다. 춘삼월부터 한맺힌 저는 제 자신을 열심히 바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러 큰소리로 떠들고, 많이 웃고, 노는 자리에도 빠지지 않고, 학교 축제에도 참가하며 공부까지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고 싫다는 의사표현조차 삼갔습니다. 싫은 일에 웃고, 좋은 일에 찌푸리기 일쑤였지만 차츰 바뀌어가는 내 모습에 마음은 흡족했습니다. 교실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는 성취감에 젖어 중학교 3년을 정신없이 보낸 후, 저는 아무 걱정없이 고등학교 교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3년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있었고, 피나는 노력으로 훌륭하게 변신한 내 모습이 있었기에 겁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변함없이 행복할 것만 같았던 고등학교 생활은 한마디로 지옥이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행복하지가 않아.” 간신히 고민을 털어 놓았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똑같았습니다.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뭐가 문제냐며 되묻는 사람들에게 아무 대답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 머리를 쥐어뜯어 보기도 여러 번. 즐겁게 떠들어도 마음 한 구석이 늘 불편했습니다. 만사가 다 귀찮아 입도 열지 않았고 당연히 공부 능률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애써 탈출한 어두운 구석자리를 제 발로 다시 찾는 기분이었습니다.
구석자리로 돌아 간 저는 처음부터 되짚어갔습니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데 갑자기 불행해진 이유를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때, 제 발에 구두가 신겨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화려한 장식이 발을 떼지 못할 정도로 무겁게 달린 구두, 높고 가는 굽이 부러질 듯 위태로운 구두, 발을 지나치게 조여 매어 생채기를 내는 구두,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들어 나 스스로를 상처 입힌 괴물같은 구두를 신고 3년을 넘게 걸은 것입니다. 발돋움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높은 구두위에 오르는 것이 족쇄를 차는 일과 같다는 것을 어린 제가 알 턱이 없었습니다. 완벽한 내 모습과 칭찬만 쫓아 자신을 꾸며대다가 끝내는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가식이 만든 세상에서 살았으니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벌이었습니다. 3년 전 그 구석진 자리에서 억지로 발에 우겨넣었던 구두를 벗겨낼 시간이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맨발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맨발이라 겪어야하는 고통도 경험하는 것이 진짜 성장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말입니다. 벗어버린 구두 굽 대신 마음의 키를 키우며 사는 오늘. 가뿐한 맨발로 내딛는 발걸음에서 행복을 되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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