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연> 손글씨 예찬(禮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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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연> 손글씨 예찬(禮讚)오부영 군청 방재산림과장

영월신문 | c3740039@chol.com

승인 2007.08.24 16:41:09

온통 땅덩어리 전체가 용광로 같은 참 무더운 짜증나는 여름 날씨의 연속이다. 인사 발령에 의해 자리를 옮기고 그 동안 사무실에 첩첩이 묻어 놓았던 택배 상자 서 너 개 분량의 책들을 작은방 책장에 정리하면서 더위를 잠시나마 잊어 볼 심산이었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아주 오래된 보물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18년쯤 전의 중앙부처의 연두 보고서 사본이었다.
그 시절 선배 공무원으로부터 입수한 보고서는 규격이며, 글자의 배열이며 손 글씨의 맵시가 너무나 멋있고 따라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지라 몇 날을 두고 습작을 해보고 또 해 본 그런 기억이 난다. 지금 보아도 참 멋진 글씨체라는 느낌이고 보면 당시에는 더 말할 나위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존경의 대상이고 그 손을 빌리려 애쓴 기억이 기성세대에게는 한번쯤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물론 예술적인 서예와는 다른 시각에서이지만···. 어느 칼럼에서인가 “글 잘 쓰는 사람은 늘었는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없다. 컴퓨터 탓이다. 학생들이 꽤나 정성들여 작성해 제출한 리포트도 글씨체가 너무 조악해서 봐줄 수가 없다. 대학생들의 글씨가 중학교 신입생만도 못한 게 수두룩하다. 우리의 교육 과정도 글씨 잘 쓰는 공부는 제쳐놓은 듯하다. 이대로 방치하다 보면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이 땅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신 시인 교수님의 글을 본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내 아들 녀석도 대학 입학 전까지 제발 글씨 좀 잘 쓰라고 애원하다시피 하였으니 그 교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다. 우선 우리의 주위, 직장에서도 글씨를 썩 잘 쓴다, 또는 필체 참 좋다라는 칭찬을 들을만한 사람을 딱히 발견하기 힘들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대한민국은 역시 IT 강국이 아닌가? 아날로그는 가라! 첨단 디지털을 넘어 이제는 최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육필(손 글씨)을 고색창연한 말로 치부하기에는 그래도 아깝다는 생각을 해 보면 어떨까 한다. 물론 이제는 누구나 글을 ‘쓰는’게 아니라 ‘치는’ 세상이 되었으니 할 말은 없다.
몇 개월 전 방송에서 손 글씨에 관한 시민들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던 생각이 난다. 요즈음 휴대폰에도 손 글씨체라는 게 생겼고 한 술 더해서 캘리그래피(calligraphy)가 각광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젊은이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연애시절 써 주신 편지를 봤는데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들 있잖아요. 상대방한테 감정을 전하고 싶은 그런 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던 것 같아요”라 했고 한 고등학생은 “펜을 쓰면서 성격이 많이 죽었어요. 옛날 같으면 툭 건드리면 싸웠는데 지금은 참자 이런 식으로···”
또 젊은 아빠는 “제가 우리 아버님을 기억하듯이 우리 딸도 계속 저를 기억 해 줬음 하는, 잊혀지지 말고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한테 내가 잊혀지지 않았음 하는 거··· 아빠는 절절한 사랑으로 편지를 봉합니다.” 어느 교수님은 “이메일이 고속 전철이라면 육필 편지라는 것은 마치 도보 여행이라든가 자전거 여행처럼 천천히 생각하고 사유하고··· 내 에너지를 통해서 이 세상을 향유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재 기자의 인터뷰 마무리 멘트가 퍽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디지털 시대, 정이 담긴 손 글씨, 육필은 오히려 그 생명력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가 9년 전에 여행 다녀 온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승진 축하 만년필이다. 1838년 설립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독일제 사다새(가람조)가 새겨진 검은색 페리칸이다. 이제는 손에 익어서 아끼지만 앞으로도 오래토록 신세를 져야하는 분신과도 같은 필기구다. 이 글도 페리칸 만년필로 다듬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달 일간지에 소개된 국민 시인 안도현님의 글 중 일부분을 소개하면서 손글씨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해해 본다.
-고작 석줄 밖에 안 되는 졸시 ‘너에게 묻는다 ’ 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가 전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제목이 ‘연탄재’ 로 바뀌는가 하면 새로운 변종들이 생겨난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모든 국민이 다 서예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국어라는 글자 고유의 조형미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글씨에 인격이 드러난다는 말은 케케묵은 관용구가 되었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너나없이 책꽂이에 꽂아 두던 ‘펜글씨 교본’ 같은 책을 다시 우리 학생들의 손에 쥐어 줘야 하나?-